한국사. 세계사 알아보기

한중록 . 정병설작가 해설

자유로운 영혼(이국희) 2015. 3. 5. 06:06

한중록. 인간과 정치의 겉과 속

한국사람치고 한중록과 사도세자를 모르는 이는 없다. 중고등학교 수업시간에 배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번 들으면 일을 수 없는 사건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죽지는 못할망정 아들을 죽인다는게 말이나 되는가. 그것도 우발적인 것도 아니고, 뒤주에 가두어 만칠일 동안 서서히 죽게 했다.

 게다가 죽인 사람은 누구이며 죽은 사람은 누구던가. 죽인 사람은 영조 임금이고, 죽은 사람은 그의 하나밖에 없느 ㄴ아들 사도세가가 아니던다.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자기 대를 이을 왕자를 죽인 것이다. 아들까지 죽인 임금이니 폭군이겠거니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영조는 무려 53년이라는 긴 세월은 왕좌에 있으면서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성군이 아들을 죽이다니 그것고 서서히 죽게 했다니 도대체 세자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  흔히들 알고 있는 한중록은 바로 이 사건의 경과를 쓴 글이다.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피눈물을 쏟으며 회고하 ㄴ것으로 알고 있다. 한중록은 사도세자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세 차례에 걸친 회고가 합쳐진 것이다. 한중록은 일반 독자를 위해 만들어진 책도 아니요 목판이나 활자로 간행된 것도 아니다. 원래 친정 식구들 또는 손자 임금에게 보이려고 쓴글이어서 서건 의 전후 배경을 잘 모르면 이해하기가쉽지 않다. 또 필사본으로 전해졌기에 여러 경로로 전하는 동안 이본에 따라 구성이나 내용도 약간씩 달라졌다.

 

정치사로 본 혜경궁의 일생

임오화변

혜경궁은 1735년에 태어나 1815년에 죽었다. 만 팔십 년이 넘는 긴 세월을 산 것이다. 온갖 풍파에 시달리며 몇 번씩이나 죽을 결심을 하고 몇 번씩이나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참 질긴 삶이다.

혜경궁에게 친정은 정명공주로부터 기억된다. 선조의 딸로 태어나 어머니 인목대비와 함께 광해군에 의해 서궁에 유패되는 고초는 겪었던 정명공주는 인조반정후 홍주원과 결혼하여 홍씨네로 들어온다. 혜경궁에게는 오대조 할머니이다. 이후 고조부 홍만용. 증조부 홍중기. 조부 홍변보가 내리 이조 예조 등의 판서를 역임했다. 혜경궁 친정은 노론의 대표적인 명문이었다.  명문가의 딸로 불과 아홉 살 나이에 세자빈에 뽑힌 혜경궁은 열 살 의 어린 나이에 숨 막히게 지엄한 궁중으로 들어가 조심조심 살아야 했다. 시아비가 아니라도 어렵고 무서운 영조는 처음 본 어린 며느리에게 세자 섬길 때 부드러이 섬기고 말소리나 얼굴빛을 가벼이 말고, 눈이 넓어 무슨일을 보아도 그것들을 모두 궁중에서는 예삿일이니 모르는 체 하고 먼저 아는 모습을 보이지 마라. 여편네 속옷 밞으로 남편을 빌 것이 아니니, 세자 보는 데 옷을 함부로 혜쳐 보이지 말고. 여편네 수건에 묻은 연지가 비록 고운 연지라 해도 아름답지 않으니 묻히지 마라. 충고했다. 편하게 대해도 어려운 사람이 첫 만남부터 세세한 충고까지 했으니 혜경궁은 놀라고 두려워 평생  잊지 못했다.  영조의 성격이 이렇다 보니 어릴때 부터 부왕을 모신 사도세자는 더더욱 영조를 어렵게 대했다. 혜경궁이 처음 궁궐에 들어와 세자를 보니. 자기보다불과 몇 달 일찍 태어난 열 살의 세자가 어버지를 대할 때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처럼 엎드려 뵙고 있었고, 부자간에 정이라곤 느낄 수 없었다. 또 아버지의 까다로운 성격에 비해 사도세자는 우직하기만 하고 민첩하지 못해서 영조으 마음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영조는 아들을 못마땅히 여기고 사도세자는 어버지를 두려워 꺼리니, 부자 사이는 계속 멀어져갔고, 이런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한 사도세자는 급기야 보퉁의 아이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혜경궁은 그 시작을 결혼 이들해인 1745으로 기억하고 있다.  부자 사이가 멀어지고 사도세자의 병중이 심해지면서 세자는 나중에는 의대증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강박증까지 겪게 되었다.  의대증이란 옷을 쉽게 입지 못하는 증세를 가리킨다. 또 사도세자는 우물에 몸을 던진 자살 소동을 벌인 것은 물론 발병하면 사람까지 죽였다. 이렇게 사도세자에게 이상 징후가 보이자 영조 이후의 차기 권력구도를 놓고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나중에 사도세자를 죽인 두 흉적으로 지목된 사람이 김상로와 홍계희 인데 김상로는 영조이 후궁인 이름바 문녀에게 기대를 걸었다고 하고. 홍계희는 1759년 예순다섯의 늙은 영조와 결혼한 열다섯 살의 정순왕후가 아들을 낳기를 바랐다고 한다.  문녀가 이미 영조 환갑때 둘째 딸을 낳아으니 한번 희망을 걸오볼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영조의 후계구도를 놓고 이처럼 다른 생각들이 돌출하는 판에도 사도세자의 병증은 더욱 깊어져서 마침내 어쩔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도세자는 몰래 궁 밖을 출입하여 별감들을 앞세워 외입하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멀리 평양까지 다녀왔다. 사도세자가 부왕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품고 갔다고도하고. 홍계희의 역모를 막기 위해 갔다고도 하며, 또 단순히 유람차 갔을 수도 있겠지만, 사도세자의 평양행은 충분히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영조야 알 수 없었지만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소리까지 공공연히 하고 다니는 판이었으니 사도세자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 나경언이 무려 열 가지나 되는 사도세자의 허물을 고해바친 사건이 벌저졌다. 나경언은 윤급의 겸종으로 윤급은 정순왕후 아버지 김한구와 한편이었다. 말하자면 정순왕후 측에서 조종했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는 고변이었다. 나경은 대궐의 별감인 나상언의 형이었기에 동생을 통해 대궐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시콜콜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정조가 사도세자의 허물과 관련된 기록을 모두 없앴기 때문에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전해지는 것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평양행 외에 , 사도세자가 총첩 빙애를 죽인 일. 궁궐에다 여승을 들인 일이 있다. 영조가 ㅅ도세자의 처벌 문제에 대해 너느 정도 마음을 굳히고 있던 차에 사도세자의 허물에 대한 말들이 더욱 많이 들려오고 마침내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조차 결단을 내리라는 말을 꺼내는 상황이 되었다. 영조는 대처분을 결심했다. 영조느 ㄴ자신이 머물던 경희궁에서 사도세자가 살던 창덕궁으로 거둥하여 자기 전부인인 정성왕후의 혼전, 곧 휘령전으로 가서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하지만 곁에 있던 신하들은 세자의 자결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 설사 세자가 대역죄를 지었다고 해도 세자의 죽음을 지켜보기만 했다느 ㄴ것이 후대에 어떤 일로 비화될지 모르는데, 세자에게 그런 대역죄가 없고 게다가 영조의 혈육이라곤 사도세자의 아들., 곹 세손 정조밖에 없으니, 나중에 정조가 즉의하면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정이 이러니 누가 세자의 죽음을 지켜 볼 수만 있겠는가.  세자의 자결 시도는 결국 주위에 있던 신하들의 만류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던 차에 누가 생각했는지 뒤주가 들어왔고 사도세자는 그 속으로 들어갔다. 사도세자는 1762년 윤 5월13일 양력으로는 7월4일의 찌는 더위 속에서 만 칠 일 을 좁은 뒤두 속에 갇혀 서서히 숨을 거두었다. 그때 세자의 나이 스믈여덟 살이었고 정조는 열한 살이었다.

정조의 등극

남편이 죽자 ㅎㄱㅇ궁이 믿고 기댈 사람이라고느 ㄴ세손인 정조뿐이었다. 다행히 정조느 ㄴ민첩하고 영리해서 할아버지 영조의 마음을 충족시켰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사도세자가 죽고 두 해가 지난 1764년 갑신ㄴㄴ에 정조를 사도세자가 아니라 벌써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두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정조로 보면 멀쩡히 앉아 아버지가 바낀 셈이고 혜경궁으로 보면 아들을 뺏긴 셈이다. 혜경궁은 갑신처분이라 불리는 이 사건 역시 정조를 자기 집에서 떼두려는 정순왕후 측의 계략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정순왕후 측은 혜경궁의 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증오의 대상디ㅏ.  혜경궁은 1759년 정순왕후가 궁중에 들어온 후, 정순왕후 특 곧 경주 김씨네가 정순왕후에게서 후사를 보고 사도세자는 폐립시킬 계획을 세웠다고 믿었다.  이어 정순왕후가 후사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사도세자가 죽자. 이후에는 경주 김씨네가 세손인 정조의 등극을 방해하고 대시 ㄴ다른 양자를 세워 왕으로 만들고자 했다고 했다. 이혐의의 핵심에는 세손은 죄인의 아들이라 왕통을 이을 수 없다 이런 판국이니 태조의 자손이기만 하다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는가라느 ㄴ이른바 열여섯 자 흉언이 있다. 사도세자도 정조도 홍씨 핏줄은 모조리 제거하고 김씨네가 조종할 수 있는 인물을 왕으로 세워 자신들이 왕의 외가노릇을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밖에서 보면 왕의 외가 노릇을 위해 두 척리인 홍씨네와 김씨네가 치열한 권력 다품을 벌인 것이다. 단 기측권층이 홍씨네이다보니. 공경은 언제나 정순왕후 측에서 시작되었다.

김씨네는 왕실의 척리가 된 지 불과 이년 밖에 안 된 시점에서 홍씨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는데,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가 영조에게 사도세자를 잘못 이끈 대신, 곧 홍봉한 등을 벌줄 것을 청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김귀주는 영조에게 척리가 너무 나선다는 엄한 질책만 들었다. 그렇지만 질책에도 불구하고 김씨네는 공격을 그칠 수 없었다. 김귀주의 증손이 편찬한 김귀주의 연보를 보면  김귀주의 아버지 김한구는 죽을 때 아들에게 홍봉한은 눈앞에 임금이 보이지 않은 지 오래라. 방자히 행동하다 어느 날 반드시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내 말을 잊지 말고 힘을 다해 나라의 은혜를 갚으라. 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김씨네의 적대감은 이처럼 철저했던 것이다.

 

이런상황에서 1769년 이른바 별감 일이 벌어졌다. 별감 일이란 세손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별감들을 앞세워 유흥에 빠지자 앞일을 걱정한 외할아버지 홍봉한이 별감들을 귀양 보낸 사건이다. 이로 인해 정조가 외가를 멀리하게 되었다는데, 이 과정에서 정조와 외가를 이간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정조의 고모이자 영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딸 화완옹주다. 화완옹주는 본래 시기와 질투가 심한데, 자기 양자 정후겸은 정조만 못할 것이 없는데도 임금이 못 되고 혜경궁은 대비가 되는데 자기는 못 되는 것을 시기했으며, 나아가 정조가 외가와 가까이 지내는 것까지 꺼렸다고 한다. 그래서 정조와 외가를 이간시켰다는 것이다.

동궁 정조가 외가를 꺼린다는 것이 알려지자. 1770년부터 홍봉한에대한 사류의 공격이 빗발치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주도한 세력 역시 김씨네라고 한다. 김씨네가 심학사니 뭐니 하는 홍씨네를 공경하는 이른바 공홍파를 후원하고 한유 같은 시골 선비를 앞세워 공격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홍봉한이 공격을 받자 영조까지 홍봉한이 혹시 정조보다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과 은신군에게 마음을 기울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했다는데, 그럿이 표출된 것이 1771년 2월의 궁성 호우령이다. 이리하여 홍씨네들은 궁지에 몰리는데, 1772년에는 김귀주와 김관주가 직접 홍봉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다.  이 상소를 통해 영조는 두 척리의 다툼을 확인하고 김시네를 엄히 질책했지만., 홍씨네에게도 등을 돌렸는데 영조 말년의 이런 시련은 정조 초련의 참화로 연결되었다.

영조 말년에 영조의 홍씨 집안에 대한 총애가 식자 조정에서는 여러사람들이 홍씨네를 공격했다. 시정이 급박해지자궁지에 몰린 홍씨네는 지원 세력을 찾는데 결국 혜경궁은 셋째 동생 홍낙임을 화완옹주의 아들 정후겸과 사귀게 했다. 정후겸에게 말을 넣어 호완옹주를 조종하여 영조의 엄중한 처벌만은 막아보자는 심사였다.  그런데 정후겸은 정조의 오른팔인 홍국영 등과 대립하고 있었기에, 이 결탁은 정조 등극 후 홍씨네가 정조 등극 방해 세력으로 지목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급한 불을 피하려다가 불구덩이에 떨어진 격이었다.  홍씨네는 홍봉한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도 혜경궁의 작은 아버지, 정확히 말하면 이복 작은 아버지인 홍인한이 정승의 벼슬을 얻어 조정을 계속 출입했는데 홍인한은 정조의 대리청정 , 궁극적으로 왕위 계승을 방해 했다는 혐의를 얻고 말았다.

1776년 드디더 정조가 등극했다. 정조는 등극의 일성으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하여 자신의 왕통을 분명해 했고 아울러 자신의 방해 세력을 제거해나갔다. 외가에도 상당한 혐의를 두었는데, 작은외할아버지인 홍인한을 사사하고, 외삼촌 홍낙임은 친국을 한 다음 풀어주었다. 외할아바지 홍봉한까지 처벌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외가를 철저히 막았던 것이다.  정조 등극 후 권력은 거의 홍국영에게 집중되었는데,  홍국영은 정명공주 후손으로 혜경궁의 일가이지만. 홍봉한과 홍인한. 특히 홍인한에게는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어서 그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고 한다. 더욱이 홍봉한의 사촌누나의 아들인 김종수가 홍국영게게 붙어서 혜경궁 집을 더욱 궁지로 몰았다고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한던 홍국영은 권력을 유지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다 오히려 자기가 놓은 덪에 결리고 말았다. 자신의 누이를 원빈을 이용하여 왕의 외가 노릇을 하려다가 오히려 권력에서 축출되었도 강릉으로 쫒겨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홍국영을 잃은 정조는 정국 운영의 폭을 넓히기 시작했는데  여러 당파를 끌어안은 것은 물론., 더불어 외가도 따뜻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1781년에는 할아버지 홍봉한과 아버지 홍낙인의 삼년상을 끝낸 외사촌 홍수영에게 벼슬을 내렸고 174뇬애눈 홍봉한에게 익정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아울러 홍봉한의 여러 협의에 대해 직접 변호했다. 이런 정조의 행동은 외가 신원의 신호탄이 되었다. 또 장년에 접어든 정조는 자신의 왕계를 높이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했는데 1789년에는 서울 동대문 밖 변두리에 초라히 자리잡고 있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 화성의 명당을 잡아 이장했고, 그 자리에 자신의 묘터도 함께 두어 사도세가가 왕계의 중심에 있음을 분면히 했다. 또 1791년에는 홍봉한의 문집 간행 사업에 착수하여 자신이 손수 수십편의 서문을 지어 붙이기도 했다.  1795년은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환갑을 맞는 해였다. 정조는 환갑을 맞이한 어머니를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화성으로 모시고 가서 큰 잔치를 베풀었고 곧 어머니의 근심걱정을 모두 풀어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정조는 특히 아들인 순조가 열다섯 살로 성인이 되는 1804년이 되면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어 화성으로 옮겨가 살면서 아들이 할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추승하게 하고 아울러 외가를 완전히 신원하게 하겠다는 말을 했다.  혜경궁의 첫번째 글은 나의 일생은 이런 낙고나적이고 희망적인 분위기에서 지어졌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하루하루 친정이 누명을 오나전히 벗을 말만 기다리고 있던 혜경궁에게 날벼락이 쳤다. 정조가 돌연 종기로 사망하 ㄴ것이다. 1800년 6월의 일이다.  갑자기 죽은 정조를 이어 순조가 즉위했으나 순조는 불과 열한살이어서 직접 통치를 할 수 없었다. 대신 궁궐의 가장 큰 어르인 정순왕후가 발을 쳐놓고 국정응 듣는 이른바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좌절을 맛보아야 했던 김씨네에게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온 것이다.  원래 충청도 서산의 가난한 선비집에 불과했던 김씨네가 어떤 경위로 왕비를 배출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는 연조의 부자이자 왕순옹주의 남편인 김한신과는 팔촌의 근친이다.  하지만 김한구는 홍봉한 문객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그래서 김씨네를 만만히 본 홍봉한이 그 집 딸을 왕비로 세우는 데 일조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만큼 두 집안은 정치적 기반에서 차이가 컷다. 그런데 김한구는 국구가 되자 곧 태도를 바꾸었다. 혜경궁 말에 따르면 형과 아우 같은 사이였는데  철천지원수가 된 것이다. 김씨네는 홍씨네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권력을 키워나갔지만 김한구가 죽고 또 정조가 등극하면서 김귀주가 흑산도로 귀양을 가서 십 년 유배생활 끝에 유배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자 혜경궁이 형용한 것 처럼 과부와 고아만 있는 집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완전히 몰락한 상태에서 권력을 쥐게 된 김씨네의 마음이 어떨지는 짐작 할 수 있는 일이다.

권력을 잡은 정순오아후는 바로 지기편을 복권시키고 상대편을 숙청했다. 홍씨네에 대해서는 계속 비판의 수위를 높이면서 죽은 홍봉한과 혜경궁 집안의 형제 자질들을 공격했다. 그 칼끝은 혜경궁도 겨누고 있었다. 혜경궁은 약방의 문안을 거부하고 단식까지 하면서 저항했는데 이에 정순왕후는 혜경궁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이 있다고 공격했고 배후로 동생 홍낙임이 지목되어 1801년 5월 제주도에서 사사되었다 홍낙임에게는 천주교 신자 오석층과 교유했다는 죄목까지 추가 되었는데 오석층과의 교유, 즉 천주교 신자라는 협으는 오석층을 잘 알 고 있는 남인 정약용까지도 말도 안되느 ㄴ협의라고 부정한 것이다.  말하자면 정순왕후는 혜경궁의 동생에게 천주교 신자라는 협의까지 씌워 서둘러 죽임으로써 지기 오빠의 원주르 ㄹ갚았던 것이다.

그때를 위해 쓴 것이 친정을 위한 변명의 전편이다.

기다리는 날은 반드시 온다. 1804년이 되어 순조가 친정을 펴자 다시 정순왕후 측이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고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끝내고 일년 남 짓 만에 죽고 말았다. 이에 궁월 안팎에 혜경궁 측과 대적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하지만 혜경궁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친정을 완전하게 신원하자면 남은 일이 많았던 것이다. 혜경궁은 친정에다 궁궐과의 왕복 편기를 정리 편집하게 하고 자신은 사도세자의 국음에 대한 세간의 의혹을 손자 순조에게 해명하고자 붓을 들었다.  그사이에 1806년 5월부터 조정에서 정순왕후 측에 대한 공세가 본격화되면서 혜경궁도 거기 가세해서 김씨네와 김종수를 공격하는 근거와논리를 마련했다. 그것이 친정을 위한 변명이다

하지만 혜경궁 친정의 완전한 신원은 쉬 이루어지지 않았다. 셋째 동생 홍낙임은 1807년 복관되었지만 작은 아버지 홍인한은 1858년에야 복관되었다. 그리고 혜경궁과 정조가 그토록 원했던 사도세자의 추승은 고종대인 1899년에야 이루어졌다.  이러써 사도세자는 장조가 되었고 혜경궁은 덩달아 의황후가 되었다.

사도세자는 비운의 죽음을 맞았지만 사도세자 이후 조선은 오로지 사도세자의 것이었다. 정조 다음의 순조와 헌종은 사도세자의 손자와 고손자요. 철종과 고종 역시 서파이지만 사도세자의 후예였다. 사도세자와 양제 곧 숙빈임씨의 사이에는 두 아들 은언군과 은신군이 있었는데 철종과 고종 은 이 서자들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은언군과 은신군 형제는 앞에서 언급한 1771년 2월 궁성 호위령과 연루되어 유배를 갔는데 동생 은신군은 유배지 제주도에서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바로 죽어버렸다. 은언군은 동생의 죽음으로 영조의 은전을 입어 풀려났지만 정조 초년에 다시 아들 담이 홍국영의 누이 원빈의 양자가 되는 바람에 역모의 협의로 입고 강화도로 유배갔다. 그러다 정순왕후 수령청정기에 아내와 며느리가 천주교라는 죄목까지 추가죄어 강화도에서 사사되고 말았다. 이런 비극의 가족사가 철종대에 와서 영광을 보았다. 강화도령이 철동이 바로 은언군의 손자 인것이다. 또 고종은 은신군의 증손이다. 은신군은 아들이 업서 남연군을 양자로 들였는데 남연군의 아들이 흥선대원군이고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고종이다.  혜궁궁은 은언군과 은신군 형제를 줄곧 생각 없고 버릇없다고 경멸했는데  그 서자의 후손이 사진이 그토록 바란 사도세자의 추승을 이루어주었던 것이다.

 

 

한중록의 가치

크게 세번에 걸쳐 이루어진 혜경궁의 저술은 그 저술 상황과 동기가 다른 만큼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장 먼저 지어진 1795년의 나의 일생은 정조가 외가를 서서히 풀어주던 희망의 시기에 서술된 글이다.  더욱이 친정 조카가 친정에 남길 글을 요구하여 지은 것이어서 두렷한 정치적 목적 같은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의 일생은 자신의 어린시절과 궁중에 들어오기까지의 경과 그리고 궁중에서의 삶 및 여러 친인척들과의 일화를 담담히 그리고 있다. 정형적인 회고록이다. 

반번 두번째 완성한 글은 친정을 위한 변명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혜경궁 친정에 다시 찬바람이 불고 급기야 동생까지 사사되는 극한 상황을 겪은 직후 만들어진 것이다. 자기 친정에 씌워진 죄명을  풀기위해 당장은 어렵더라도 곧 등극할 손자 순조에게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하여 저술하였다.  좌절과 절망 분노와 증오가 바닥에 깔려 있지만 친정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그런 감정들을 철저하 통제하며 근거와 논지를 확실히 세워서 적대 세력의 견해를 하나하나 반박하고 있다. 친정을 위한 변명으 ㄴ근거와 논리를 앞세운 일종의 정치 논변서이다.

 

한중록을 가장 돋보이게 한 작품인 내 남편 사도세자 역시 친정을 위한 변명과 같은 시기에 초고가 만들어졌다. 물론 정순왕후의 수렴천정이 끝난 다음에야 완성되었지만, 친정 신원의 급박성은 바뀌지 않았다.  마침 순조까지 할아버지의 일을 자세히 알고 싶다고 하니 이 기회를 빌려 모든 고통의 출발점이 되는 임오화변 문제를 확실히 해두자는 뜻에서 저술되었다.

내 남편 사도세자는 시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이설을 반박한 것이다. 세산의 이설이란 크게 두가지인데 하나는 사도세자가 죄가 있어서 죽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사도세자가 죄가 없는데 신하들이 부추겨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부왕에 대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고 심지어 부왕을 북이려는 행동까지 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광증으로 자신을 제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행위에는 죄가 있지만 원인을 따지면 죄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도세자의 병이 안타까울 뿐 사도세자를 위해 억울해 할 것도 없고. 또 세자를 죽인 영조에게 잘못을 물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부추긴 세력으로 지목된 자기 아버지도 이런 맥락에서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혜경궁은 이런 자신의 의견이 사건을 미봉하자고 꾸며낸 사견이 아님을 밝히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사도세자 병증의 원인과 경과를 아주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저술 배경은 이렇다보니 내 남편 사도세자는 자연 한 인물의 심리를 매우 깊이 분석하게 되었고 인물 심리의 변화 궤적까지 연대순으로 구체적으로 적다보니 흥미진진힌 인물 탐색의 서사가 되었다.  동시대는 물론 현대에서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심리 해부의 대서사가 된것이다.

한중록은 교양 높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 궁궐에 들어가 조선 최조의 지존이 되었던 혜경궁이. 자신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을 때로는 담담히 때로는 격정적으로 회고하고 비판하며 분석한 글이다.  남편인 사도세자는 시아버지의 손에 의해 죽었고 아끼던 동생은 정적의 모력으로 사약을 받아야 했다. 아들도 가까스로 왕위에 올랐지만 등극전에는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어야 했고 아버지 역시 늘상 정적의 비판에 노심초사하다숨을 거뒀다.  한중록은 최고의 위치에 있었지만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혜경궁이 일흔을 넘긴 노령에 쓸 글로 고령이 믿기기 않을 정도로 강한 정서적 격종을 보여주고 있는 그 만큼 삶의 파고가 높았던 것이다.  혜경궁은 또한 자신이 처한 높은 위치에서 여러 인물 궁상의 생각과 형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말 할 수 없는 부왕 영조의 성격젹 결함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고 아들 정조의 거짓말에 대한 서운함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또한 정의는 안중에 없이 오로지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 세태를 작품 곳고소에서 폭로하고 있다. 영조는 아내 정성왕후가 죽었을 때 죽은 부인을 위해 슬퍼하기는 커녕 궁녀들에게 농담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더욱이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에게 보였던 어이없는 행동들을 보노라면 그가 어떻게 성군으로 평가될 수 있었는지 의심스러운 지경이다 또한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행배에 따라 말과 행동을 달리하며 혜경궁 측을 공격한 김종후. 김종수 형제의 삶은 인간이란 정말 겉으로만 판단하기 아려운 존재임을 알게 한다. 스스로 청명당 또는 의리의 주인이라 자처하면서 또 밖으로느 ㄴ나는 깨끗한 관료로 처신한 김종수가 사실은 임금의 말에 맹종하며 자신을 관리해온 그저 이해를 좇는 소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인간이 가진 복잡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한중록은 현대에도 계속 읽히는 다시 읽힐 필요가 있는 고전이 되었다.  한중록은 2005년 서울대학교에서 뽑은 백 종의 권장도서 가운데 들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일 것이다ㅣ.ㅣ 한중록은 인간 삶의 복잡다단함을 높고 노숙한 위치에서 바라보게 하며 인간 삶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한다.                    정병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