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떠나는 안양 문화기행
가을은 이미 깊어졌다. 단풍이란 이름으로 또 다른 가을꽃을 피워내는 나무들의 생태는 경이롭고, 그 자연의 섭리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市木이 은행나무라서 일까, 가로수 밑의 노란 융단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은행을 줍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황금융단의 정복자가 되어 전리품을 챙기듯 여유로워 보인다. 특유하고 고약한 냄새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가을을 만끽하는 소시민들의 일상이 즐거워 보인다. 그 풍경은 가을정취가 되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내 인생의 절반을 안양에 살면서 안양천을 처음으로 걸어보았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일까. 내 삶을 반추 해보았다. 처음 걷는 이 길은 많은 사람들이 여가와 휴식을 즐기는 문화의 장소로 산책길이 되어 있었다. 맑게 흐르는 물위 저 멀리 왜가리가 고개를 들어 예민하게 사방을 살핀다. 그 모습은 마치 안양천을 지키는 척후병처럼 도심 속에서 볼 수 없는 최고의 자연 풍경을 자아낸다.
유유히 물살을 가르는 청둥오리도 반갑고 징그럽도록 살찐 잉어 떼는 안양이 참 좋은 곳이라고 속삭이는 듯 여유롭다. 갈대습지는 생태의 보호막도 되겠지만 하얗게 휘감으며 가을을 흔들어 놓는다. 갈대 위에 앉았던 작은 새 한 마리가 쌩 하고 달리는 자전거에 놀라 휙 날아가 버린다. 이렇게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져 교감 할 수 있는 안양천은 청계산에서 발원하여 학의천을 거쳐 수리산에서 발원한 수암천과 합류하고 다시 삼성천을 만나 합류하여 한강으로 흐른다.
옛 안양천은 배를 타고 건너기도 하였고 천렵을 즐겼으며 멱을 감고 물장구쳤던 추억들이 전설이 되어 흐르고 있었고, 한 때는 산업화로 공업도시가 형성되어 폐수와 오수로 수질이 나빠져 썩은 냄새로 죽어가던 황폐한 하천이기도 했다. 그렇게 잊혀진 역사는 안양천 저편에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더니 옛사람들은 이렇듯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안양천을 걸으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이러한 변화와 함께 안양천 역사가 흐르고 있다.
다리란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고 한다. 217년 전 조선의 22대 정조 임금이 실제로 건넜던 다리를 상상하며 오늘 만안교를 똑같이 건너보았다. 역사의 숨결이 온 몸에 전율로 느껴졌다.
효를 상징하는 만안교는 정조임금이 정쟁(政爭)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생부 사도세자의 능행차가 편히 하천을 건너도록 하기위해 만든 다리이다. 만백성이 만년동안 편히 건너라는 뜻으로 정조 임금이 직접 만안교(萬安橋)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원래는 남쪽방향 400m 떨어진 곳 있었던 것을 1980년 국토 확장 때 이곳으로 옮겨 복원 하면서 다리의 방향이 동서로 바뀌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임금은 수원 화산 융릉에 12번 능행차를 처음에는 한강을 건너 노량진을 거쳐 과천으로 통하는 빠른 길이었으나 남태령 이란 고갯길을 닦는데 어려움이 많고 행차 시 마다 임시로 나무다리를 가설했다가 철거하는 번거로움이 많아 백성들을 괴롭히게 되므로 능행길을 7차 부터 시흥 길로 바꾸었는데 세간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김상로의 형 김안로의 무덤이 과천에 있어 그 앞을 지나지 않으려고 능행길을 과천에서 시흥 길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유야 어찌 됐든 능행길을 과천에서 시흥 길로 바꾸게 되면서 만안교가 탄생하였으며 후대에 정조 임금은 안양에 소중한 문화유산을 남겨 주었다. 화강암으로 7개의 수문을 무지개로 틀어 축조한 만안교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이다. 장대한 화강암으로 유연하고 정교한 아치형의 곡선미를 살린 선조들의 지혜와 장인의 혼에 감탄 할 뿐이다. 능행에 참여한 인원이 많았을 때는 6,000여명과 1,400여 말이 이 다리를 건넜다고 하니 임금님 행차를 보려고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었을 과거의 만안교를 상상해 본다.
임금이 건넜던 다리를 200여년이 지난 세월에도 실제로 사람들이 건너고 편히 이용하고 있는 살아 숨 쉬는 소중한 문화재라고 당당히 말 하고 싶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38호인 만안교는 안양 8경 중 4경이다.
안양예술공원 입구 구.유유산업內 통일신라시대에 중초사란 절 앞에 세워졌던 당간지주는 오늘 날 보물 4호로 나이가 1186살이 되었고 이름은 중초사지 당간지주이다.
사찰이라는 영역을 표시하고 불교 행사를 알리는 역할을 하기 위해 세운 기둥을 당간이라 하며 기둥을 받쳐주고 고정시켜주는 것이 지주이다. 중초사가 있었던 터에 지금은 기둥은 없어지고 두개의 지주만 남아 그 시대를 대변하며 천년세월을 지키고 서 있다. 높이가 약 4m정도의 두 개의 지주 중 서쪽 바깥 면에 보물 4호가 된 비밀이 숨겨져 있다.
기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모된 글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이렇게 건축물에 새기는 글을 명문이라고 하는데 내용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826년 8월6일 동쪽 僧岳에서 한 개의 돌을 채석하여 두 개로 나누어 그 이듬해 827년 2월30일에 중초사를 완공하였고 건립책임자 경주 황룡사 주통 황창화상을 비롯하여 10명의 승려가 후원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마치 타임캡슐을 열어보는 것처럼 경이롭다. 이렇듯 제작 연대와 조성된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있는 지주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감동 그 자체이다.
안양에 하나 뿐인 보물 4호 중초사지 당간지주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더 창출하는 것이 이 시대 과제라고 생각을 해본다.
예술공원 주차장 뒤의 안양보육원 가는 그 길을 수없이 다녔다. 산자락 거대한 암벽에 웬 전각이 있을까 궁금하였지만 무심코 그냥 스쳤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92호 석수동마애종이다. 고려 초기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암벽을 다듬어 음각과 양각을 활용하여 조각한 종과 스님의 모습은 전작 속에 보호되고 있다.
종을 치는 스님의 조각을 보고 있노라면 아직 깨어나지 못한 어두운 새벽의 침묵을 뚫고 종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하다. 암벽에 새겨진 종은 한국 종의 특징인 음통과 용뉴가 상세하였으나 스님이 당목을 잡은 모습은 어설퍼 보였다. 더욱 전각 속에 마애종의 진실이 가려진 것 같아 감상하기 불편하였다.
마애불은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암벽에 범종을 조각한 것은 우리나라에 유일한 것으로 범종 연구뿐만 아니라 장인의 창의성도 엿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로 무심코 스쳤던 무지에 더욱 연민을 느낀다.
인생 후반 버킷리스트 작성하며 내 고장 안양기행이 목록 중 하나였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고 한다. 문화유산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문화재를 통하여 옛 사람과 끊임없이 대화 하며 소중한 문화재의 가치와 역사의 숨결을 재발견 하는 체험은 도시생활에 지친 정신과 마음을 치유하는 최고의 힐링(healing) 문화기행은 행복한 하루였다.
2012년 안양여성 계간지 가을호 게제
안양시문화유산해설사회 이국희
koohe48 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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