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송림사 5층전탑 [漆谷松林寺五層塼塔]
보물 제189호.
토축(土築)의 얕은 단층 기단 위에 세워진 전탑
신라시대의 탑 가운데 유일하게 금동상륜부(金銅相輪部)가 남아 있음.
1층 옥신이 가장 높으며 2층 이상의 옥신과 옥개석은 높이와 체감률이 완만하여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옥개부에는 전탑의 일반적인 방식대로 상하에 층단을 두었는데 받침수는 1층부터 9·7·7·6·4단이고, 낙수면의 층단수는 11·9·8·7·5단이다.
낙수면의 층단수가 많아 각 층의 옥개부는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벽돌로 쌓은 노반(露盤) 위 모퉁이에 풍령(風鈴)을 단 동판으로 된 갑석이 있고, 그 위 목제 찰주(擦柱)·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용차(龍車)·보주(寶珠)가 차례로 얹혀 있다.
현재의 상륜부는 1959년 해체·보수 공사 때 원형대로 모조한 것이며, 이때 1층 옥신과 2·3층 옥개부에서 제작시기가 다른 사리장치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나왔다.
이로 인해 여러 차례의 해체·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층 옥신 남면에 감실(龕室)이 개설되었던 것을 후세에 벽돌로 막은 사실도 밝혀졌다.
안동 조탑동5층전탑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탑.
조탑리 들판 한가운데 탑만 서 있을 뿐, 사지(寺址)로 추정할 만한 유물은 볼 수 없다.
이 전탑의 특징은 제1층 옥신(屋身)을 화강석으로 축조하였다는 점
우리 나라 전탑에는 거의 모두 화강석을 혼용하고 있으나 이 전탑에서는 그러한 의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나 있다.
1층 옥신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화강석을 5단-6단으로 쌓았는데, 상단은 폭이 약간 줄어들었다.
남면에는 좌우에 반원형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맛돌을 얹어 감실(龕室)을 개설하였으며, 내부 중앙에는 각형(角形) 목심주(木心柱)가 남아 있다.
특히, 감실 입구 좌우에는 인왕상(仁王像)을 조각한 화강석 판석을 벽에 끼워넣었다.
제1층 옥개(屋蓋)부터는 네모난 벽돌을 사용하여 축조
제1층 옥개에 사용한 벽돌 중에는 둘레에 연주문(聯珠文)을 두르고 그 안에 당초문(唐草文)을 돋을새김한 것이 포함되어 있어, 여러 차례의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각 층 옥개는 벽돌 한 장 두께로 처마를 삼고 제1층 옥개만은 하단, 즉 옥신 위에 벽돌 두 장을 쌓아 굄을 삼았다.
옥개 밑의 받침수는 초층부터 9단·8단·7단·6단·3단이며, 낙수면의 층단수는 초층부터 7단·5단·4단·3단이다.
옥신은 제1층의 높이에 비하여 2층 이상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2층부터의 체감률은 경미하여 안정감이 있다.
또, 제2층과 제4층 옥신 남면에는 각각 극히 형식적인 감형(龕形)이 있어 그 형식이 안동시 동부동 오층전탑과 상통하는 바 있다.
제4층 옥신에 비하여 제5층 옥신의 높이가 높아졌고 사용된 벽돌도 서로 달라서 후세의 수리 때의 변형으로 보인다.
안동신세동7층전탑
경상북도 안동시 신세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탑.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탑을 말한다.
安東의 향토지인 「永嘉誌(영가지)」에는 7층 전탑이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건조물로서 조선 成宗 18년(1487)에 개축되었는데, 당시까지 法興寺가 세 칸 정도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전탑이 있는 동네 이름 역시 法興洞이다.
전탑 이외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이 터에는 固城李氏 塔洞派 宗宅(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이 들어서 있다.
한국 최고(最古) 최대의 전탑이다.
기단(基壇)은 단층에 평면은 방형(方形)인데 현재는 지표에 팔부중상(八部衆像) 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한 화강석 판석을 1면에 6매씩 세우고 남면 중앙에는 계단을 설치
팔부중상이나 사천왕상들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제작연대에 서로 차이가 있고, 배치순서도 무질서하고 기단 상면은 비스듬히 둥글게 시멘트를 칠하여 어느 정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전탑 축조는 당시로는 첨단 공법이었다.
벽돌 크기는 길이 28cm, 너비 14cm, 두께 6cm 정도다. 이런 벽돌들을 벽면에 평평하게가 아니라 들쭉날쭉 쌓았다. 이렇게 지그재그로 쌓아야 위에서 누르는 힘이 균등하게 전달되어 탑이 안전하다는 것이다.
모서리 부분에는 바닥 벽돌과 같은 정사각형 벽돌을 따로 사용했다.
하단의 옥개 부분의 층수보다 상단의 낙수면 부분의 층수를 한 단씩 더 많게 만들어 落水面(낙수면)의 기울기를 높였다.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을 길이 약 28㎝, 너비 약 14㎝, 두께 약 6㎝의 회흑색 무문전(無文塼)으로 어긋나게 쌓았다.
초층 옥신(屋身)은 매우 높고 남면 중앙 하반부에 화강석으로 테를 둘러서 작은 감실(龕室)을 개설하였다.
2층 옥신은 1층 옥신의 높이에 비하여 약 4분의 1로 높이가 급격히 줄었을 뿐 3층부터는의 체감률이 심하지 않아, 7층이라는 고층인데도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옥개석(屋蓋石) 밑의 받침 수는 초층부터 9단·8단·7단·6단·5단·3단이고, 옥개 상면의 층단 수는 초층부터 12단·10단·9단·8단·7단·6단·5단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체감되었다.
현재 낙수면에는 극히 일부에 기와를 입혔던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보면 당초에는 각 층 낙수면에 모두 기와를 입혔던 듯하다. 이것은 전탑에 앞서 목탑이 존재하였고 전탑은 목탑을 번안(飜案)한 것임을 보여 준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다.
봉감모전5층석탑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높이 9m.
이 마을을 ‘봉감(鳳甘)’이라고 부르기도 하여 ‘봉감탑’이라 이름붙여졌다.
석탑 주변의 논밭에 기와조각과 청자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어, 이 일대가 옛날 절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탑(塼塔)의 형식을 따라 지표에 토석(土石)을 섞어 단층의 기단을 축조하고, 자연석으로 굄을 만든 다음 모전석재를 이용하여 2단의 탑신 받침을 쌓았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屋蓋) 모두 벽돌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를 사용
초층 옥신 남면에는 감실(龕室)을 개설
2층 이상의 옥신부는 옥신의 상하가 다른 모양으로 되어 다른 전탑이나 모전탑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옥개부는 전탑의 형식을 따라 추녀의 너비가 좁아졌고 상하에 모두 층단받침이 있으며, 초층 옥개의 받침수는 8단이고 위로 갈수록 체감되었다.
현재 탑의 상태는 5층의 옥신부까지만 남아 있다.
선산낙산동3층석탑
현재 이 탑은 약간의 손상이 있으나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인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부는 아래층 기단 가운데돌에 모서리기둥 2개와 가운데기둥 3개, 즉 한 면에 5개의 기둥이 새겨져 있다.
위층 기단 가운데돌에는 모서리기둥 2개와 가운데기둥 2개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남쪽에 불상을 모시기 위한 방이 설치되어 있고,
방 입구에는 문을 달았던 동그란 구멍이 남아 있다.
지붕돌은 아래받침과 지붕 추녀, 윗면 층단 모두 전탑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지고 머리장식을 받치던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이 탑의 아래층 기단에 가운데기둥을 3개나 새긴 것은 초기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는데,
몸돌과 지붕돌의 구성방법은 다소 시대가 떨어지는 면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양식은 선산죽장동오층석탑(국보 제130호)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일종의 모전석탑 계열에 속하는 유형이다.
돌의 구성에서도 규율성을 잃지 않고, 기단부의 구조와 각 부를 짠 수법으로 보아 석탑의 건립시기는 8세기경인 통일신라 전기로 추정된다.
선산죽장동5층석탑
통일신사시대의 5층 석탑으로 높이가 10m이다.
죽장사지(현 서황사)에 서 있으며, 5층 석탑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큰 탑에 속한다.
석탑의 구성은 신라의 일반적 석탑과 같이 기단부 위에 옥신이 놓이고 그 위에 상륜부를 장식하고 있는데 지대석에서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100여개가 넘는 많은 석재로 구성된 점이 특히 주목된다.
기단부는 18매의 장대석으로 지대를 구축하고 그 위에 상하 이중의 기단을 마련했다. 하층 기단 면석은 14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고, 그 위의 갑석은 18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다.
갑석 상면의 네 귀퉁이 합각은 옥개석상면의 합각처럼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하층기단 갑석 위에는 15매의 장대석으로 짜여진 높은 굄 2단이 마련되었고, 상층 기단 면석은 10매의 판석으로 조립되었다.
이 탑의 이중기단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하층기단을 살펴보면 우주나 탱주가 전혀 보이지 않으며, 상층 기단에는 이와 달리 각 면에 3개의 탱주와 양우주가 있다.
그것도 다른 탑들처럼 새겨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우주와 탱주를 판석과 결합하여 기단부를 구성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탑신부는 위로 올라가면서 석재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감실 입구에는 각형과 호형으로 몰딩하여 액을 돌렀으며, 내부 좌우의 상하에는 문을 달았던 작은 원공이 남아있다.
초층 옥개석은 4매석으로 구성되었는데, 옥개받침은 6단이고 처마에는 낙수홈이 음각되있있다.
1층 옥신의 낙수면은 7단의 층단을 이루고 있다. 2층 이상의 옥신은 2∼4매석으로 구성되었고 3-5단의 옥개받침이 표현되었다. 또한 처마에는 낙수홈이 음각되었는데, 낙수면은 5,6단의 층단을 이루고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만이 남아있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 양식인 이중 기단을 형성하고 있으나, 탑신부에는 옥신 약쪽에 우주가 없어 이형적이다.
또 옥개양식에 있어서 낙수면에 층단을 이루는 형태는 전탑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일반형 석탑에서 나타나는 것은 드문 예이다.
따라서 이 석탑은 벽돌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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