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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프랑스 혁명과 맑스주의 해석과 반론.

자유로운 영혼(이국희) 2014. 1. 18. 08:29

(음악에서 혁명은 락이다. 중에서...

오늘날 기회 균등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실은 한스페터 마르틴이 <세계화의 덫>(1997)에서 경고한 ‘20 대 80 사회’를 향해 날로 고착화하는 형편이다. 인구의 80%가 좌절을 맛봐야 하는 세상. 그러나 요컨대, 문제를 느끼는 것과 비판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카터 행정부에서 안보 담당 보좌관을 지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20 대 80 사회’에서 ‘티티테인먼트’(엄마 젖을 뜻하는 티티(Titty)와 엔터테인먼트의 합성어)가 대두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좌절한 8할을 달래기 위한 ‘양식과 오락’, 히틀러가 얘기했던 ‘빵과 서커스’를 연상시키는 조어다. 요즘 티브이를 장식하는 오락물들이 그런 징후를 드러내는 인식의 마취제라면, 흑인이고 여성이며 동성애자로서 소수자(중의 소수자)를 대변한 채프먼의 체험적 진술로서 ‘패스트 카’는 현실의 각성제라기에 모자람이 없다. 생각건대, 로큰롤의 사회적 가치란 그런 것일 터다.“우리가, 음악이 아니라, 문학에서 기대하는 물음”을 성공적으로 로큰롤에 접목해냈다는 것이다.“현실도피적 주제를 노래한 백인들”이 주류를 장악한 당시에 그것은 “문자 그대로 충격적” 결과라고 평했다.)

 

 

맑스주의적 해석은 프랑스 혁명을 앞에서 말한 대로 새로 흥기한 부르주아 계급과 전통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는 귀족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으로 본다. 따라서 부르주아 계급의 흥기가 혁명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물론 르페브르는 혁명에서 농민의 역할을 중시했고, 나중에 소불은 도시 소시민들의 민중혁명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부르주아 혁명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생각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수 세기 동안 성장하여 18세기에 오면 경제력이나 개인적 능력,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 귀족계급보다 우월한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이들은 토지가 아니라 동산적(動産的)이며 상업적인 새로운 형태의 재산에 기초해 있었고 또 계몽사상가들이나 경제학자들이 만든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의해 지지되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목적은 시민적 평등이다.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의 특권을 없애고, 모든 사람이 같은 법의 지배를 받고, 같은 기준에 따른 세금을 내고, 같은 공직 취임의 기회를 갖고, 같은 조건으로 재산을 소유하는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1788년 군주제의 약화는 부르주아계급에게 그들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세력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농민과, 도시의 소시민 대중들이 그것이다. 1788-9년의 경제위기로 고통을 받은 농민들은 혁명 초기에 광범한 농촌지역에서 소요를 일으키며 봉건적인 영주권에 강력히 저항함으로써 혁명을 진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상큘로트라고 불린 도시의 소시민들은 혁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들고 일어나 혁명을 급진화시켰고 마침내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때로는 반자본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봉건제의 파괴라는 혁명의 목표를 달성하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1789년의 혁명은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부르주아 계급이 과거의 특권을 대표하는 귀족계급을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것은 봉건제의 폐지(1789년 8월 4일)를 통해 과거의 특권적인 질서를 전복하고, 프랑스인권선언(1789년 8월 26일)을 통해 시민의 자유와 평등, 인민주권,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 법 앞에서의 시민의 평등, 언론과 출판의 자유, 사유재산의 신성성 등을 선언했다. 또 헌법(1791년 9월)을 만들었고, 입헌군주제를 넘어 민주적인 공화제(1792년 9월)까지 달성했다. 국민공회가 집권했던 공화국 시기가 혁명의 절정기이다.


그러나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 계급은 모든 인류의 이름으로 혁명을 주장하고 선전했으나 실제로 그들의 목표는 좁게 제한되어 있었다. 재산 있는 자의 지배라는 자유주의적 태도가 그것이다. 따라서 구질서와 항상 타협하려 했고 대중의 진정하게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열망을 좌절시키려 했다(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아주 간단히 구분하면 자유주의는 일정한 수준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성인남자에게만 참정권을 주는 것이고, 민주주의는 재산에 관계없이 모든 성인남자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이다).
  
  그들의 계급이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이 로베스삐에르를 실각시킨 1794년 7월의 테르미도르 반동이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저지른 군사쿠데타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프랑스혁명은 세계사를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또 근대세계로 넘어가게 만든 결정적인 단계이다. 그리고 혁명이 만들어낸 자유와 평등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인 이념이 되어 전 세계를 일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프랑스혁명을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으로 만든 것은 맑스에 의하면 그 속도와 폭력성, 완전성이다. 가장 성공한 혁명이라는 말이다.
  
  맑스주의 역사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점은 혁명을 자신과 일체화하는 경향이다. 특히 소불이 그런데 그의 논조는 마치 자신이 혁명을 대변하는 듯한 웅변조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역사적 객관성을 잃게가능성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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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폭력성, 완전성이라는
맑스의 평가를 언급하셨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그 잔인성을
예시해주셨으면 합니다.

미국이 '혁명'이란 것 자체에 생래적인 거부감을 가지게 된 것이 --미국은 스스로는 남북 전쟁이라 함--

바로 프랑스혁명의 폭력과 잔인성에 놀란 때문이라고 하는 학자의 이야기를 읽었거든요...

프랑스 혁명의 한계나 과오도 명백히 짚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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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해석에 대해 처음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영국의 알프레드 코반(1901-1968)이다. 그는 1954년의 런던 대학 프랑스혁명사 교수 취임 강연에서 <프랑스혁명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맑스주의적 해석을 처음으로 비판했다.
  그는 우선 혁명이 파괴했다고 하는 봉건제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했다. 토지소유에 기초한 통치체제로서의 봉건제는 프랑스에서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18세기에 남아 있던 것은 단지 그 의미 없는 흔적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봉건제 폐지의 의미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혁명적인 부르주아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들의 출신을 분석하여 그 가운데 13%만이 상인, 제조업자, 금융업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 외 대부분의 대표들은 지방의 낮은 직위의 관리들, 검찰관, 판사 같은 직을 역임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맑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보면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용어가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코반의 주장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건드릴 수 없는 금기를 깨뜨리는 중요한 일을 한 셈이다. 1964년에 그는 자신의 논지를 더 보강하여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해석>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때쯤이면 다른 사람들이 이 일에 가담하게 된다.
  
  미국 학자인 조지 테일러는 1967년에 <비자본주의적 부와 프랑스혁명의 기원>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가 한 일은 혁명 이전의 부르주아계급과 귀족계급의 투자 행태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결과는 비슷했다. 두 계급의 이해관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1973년의 콜린 루카스의 <귀족, 부르주아, 프랑스혁명의 기원>이라는 글에 의해 다시 뒷받침 되었다. 많은 경험적 증거를 제시하며 루카스는 구체제 말의 부르주아와 귀족이 동질적인 지배 엘리트 집단의 구성원이었음을 밝혔다. 귀족이 특권을 독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아직 소수파이기는 하나 학계에 확고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혁명 연구의 본산은 프랑스였으므로 이런 주장들이 프랑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큰 의미가 없었다. 1978년에 전기가 왔다. 그 해에 프랑소아 퓌레(1927-1997)가 <프랑스혁명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는 이미 1971년에 <혁명의 교리문답>이라는 글을 통해 맑스주의자들의 천편일률적인 계급투쟁론이, 논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카톨릭의 '교리문답'적 성격을 가졌고 민족적 영광과 레닌주의적 이론에 사로잡혀 있다고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영미의 수정주의 학자들이 사회경제적인 측면에 중점을 둔 데 비해 그는 정치와 이데올로기 면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혁명 해석의 전반적인 전복을 꾀했다.
  
  맑스주의자들은 자코뱅파에 의해 혁명이 과격해진 1792년 8월-1794년 7월의 시기를 높이 평가하나 1789-1792년의 온건한 시기에 이루어진 성취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는 본다. 특히 봉건제 폐지 선언 같은 것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로 높이 평가한다.
또 전통적으로 크레인 브린튼을 비롯한 영국과 미국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1789-92년의 온건했던 시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다. 다만 93-94년의 공포정치 시기는 혁명이 국내의 물가고나 정치적 혼란, 대외 전쟁 등으로 과격해졌고 그래서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 시기로 보았다.
  
  그러나 퓌레는 혁명이 1789년의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국민의회가 처음부터 신중한 토의 끝에 루소의 인민주권설과 일반의지론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이론에 의해 만들어진 민주주의는 동의에 의한 통치나 개인적 인권을 존중하는 형태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혁명이 인민주권이라는 과격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임으로써 어떤 권력남용도 인민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한 변명될 수 있었으므로 혁명은 처음부터 독재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공포정치시기에 공공연하게 표출되었을 뿐이다. 또 그는 나폴레옹의 제국도 그 독재적 본질에서는 혁명기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 종막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 시기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프랑스인이 자유롭게 된 것뿐이며 개인은 국가에 예속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반대도 혁명의 통일성을 해치는 분파투쟁으로 거부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코반까지도 사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80년대로 들어서며 퓌레의 주장은 점점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고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점점 더 많은 주제로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혁명 200주년이 된 1989년 즈음에는 퓌레가 혁명사 연구에 있어 프랑스 내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최근 2, 30년 사이의 프랑스혁명사 연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맑스주의적 해석이 삽시간에 거의 붕괴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연구가 지나치게 맑스주의 도식에 의존함으로써 역사현실과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그렇게 오랫동안 주류해석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1930년대, 2차대전의 혼란기와 그 이후에 혁명사 연구가 대체로 부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페브르 같은 사람의 주장이 과도하게 오랫동안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실증적인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면 더 이상 정통적인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지금도 물론 맑스주의적 해석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숫자도 작고 영향력도 미미하다. 맑스주의자들 가운데에도 계급투쟁설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으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최근의 연구들을 통해 프랑스혁명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한 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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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주의 사관의 비밀
당통 / 2008-05-21 오후 2: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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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은 대영제국이 그들의 알바 (루소, 볼테르, 당통,마라....) 를 풀어 프랑스 정부를 뒤집은 쿠데타였다.

대영제국은 프랑스 정부가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한 것에 '응징'을 했고
동시에 나폴레옹을 통해서 유럽에 반동체제를 조작, 미국혁명의 유럽으로의 파급을 차단했다.

로스차일드/부시 가문이 히틀러를 권력에 내세워 세계전쟁을 일으킨 것과 같은 각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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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프랑스 혁명보다는 영국의 명예혁명이 인류의 발전에 기여 한 바가 크다고 보았다.

 이유는 명예혁명은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계급간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여--양당제 채택--그 후 인류

정치사에 새로운 모델이 되었고, --계급간 갈등 해결을 투쟁이 아닌 타협이라는 의식으로 이룰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고 그러한 생각을 제도적으로 만듬--명예혁명은 갈등을 폭력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합의로 승화시켰기에 반동같은 부작용이 없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하겠다. 역사발전 모델로 새울만한 본보기이다.

 

이에 비해 프랑스혁명은 갈등을 폭력적으로 해결했고, 그 결과 새로운 집권세력도 그 전 집권세력과 다르지 않은 폭력성을 드러내게 되 부작용은 아직까지 --맑스주의자들에게서 남아 있음--존속하고 있다.

 

 

출처 : 나의 공간
글쓴이 : 아놀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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