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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항복과정

자유로운 영혼(이국희) 2012. 1. 3. 23:06

병자호란때 항복과정은

병자호란의 전개 과정

(1) 후금은 명을 멸망시키고 나라 이름을 청이라 고친 후, 천자라고 칭하고 조선에 신하의 관계를 강요하였으며, 보다 많은 조공을 요구하였다.

(2) 당시 조선에서는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론과 현실적으로 싸우기 어렵다는 주화론이 맞서 다가 점차 과도해지는 청의 요구에 분노가 폭발하여 마침내 척화론이 우세하였다. 이런 반청 분위기를 알아차린 청은 청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병자호란이 일어났다.(1636년)

(3) 병자호란 발발 후 닷새만에 청군이 서울 근교까지 육박하자 먼저 왕자 등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인조도 강화도로 가려 했으나 청의 선봉군에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청군에 포위된 남한산성은 군사와 군량 모두가 충분치 않은 데다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도 최명길 등의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항복을 결심하고 삼전도(지금의 송파)의 청태종 진영에 나아가 추운 한겨울에 3배 9고두(상복을 입고 3번 큰절을 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꽝꽝 처박으며 조아리는데 이 때 단 위에 앉아 있는 청태종의 귀에 들릴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인조의 이마에는 피가 많이 흘렀다고 한다)를 행하고 신하의 맹세를 하였다.

(4) 병자호란 후 청나라는 세자와 봉림대군, 척화파였던 3학사(오달제·윤집·홍익한), 김상헌 등을 인질로 잡아갔다.

(5) 비록 45일간이라는 짧은 전쟁 기간이었으나 청군이 거쳐 간 서북 지방은 약탈과 살육에 의해 황폐해졌고 몇 만 명이 포로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으니 이는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 보지 못한 일대 굴욕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전쟁이 끝난 뒤에 조선의 청에 대한 반감은 적개심으로 더욱 고조되었다.